기사 메일전송
한간(漢簡) 《노자(老子)》 - 개요
  • 최남규 전북대학교 명예교수
  • 등록 2026-08-06 13:26:55
  • 수정 2026-08-07 09:02:31
기사수정
  • 지하 출토 문헌 《노자》 1
  • <월간 서예문인화> 2026년 8월호 게재

《노자(老子)》는 경전 중 《성경》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번역된 책이다. 노자와 관련한 유명한 성어로 ‘자기동래(紫氣東來)’가 있다. 노자가 서쪽으로 유람할 때 함곡관 영윤(令尹) 희(喜)가 동쪽에서 자줏빛 기운(紫氣)이 나타난 것을 보았는데, 후에 노자가 푸른 소를 타고 관소를 지나갔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말이다. ‘길상(祥瑞)’이나 ‘좋은 벗’ 혹은 ‘문명의 도래’의 징조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지하 출토 문헌’이란 그동안 땅속에서 약 2000여 년 동안 묻혀 있다가 20세기 후에 지상에 나온 자료를 말한다. 《노자》의 지하 출토 문헌을 정리한 자료는 《곽점초묘죽간(郭店楚墓竹簡)》(이하 《곽점》), 《마왕퇴한묘백서(馬王堆漢墓帛書·壹)》(이하 《백서》<갑><을>), 《북경대학장서한죽서(北京大學藏西漢竹書·二)》(이하 《한간》)이 대표적이다. 《백서》는 최근에 복단대학교 출판사에서 다시 정리한 《장사마왕퇴한묘간백집성(長沙馬王堆漢墓簡帛集成·貳)》(湖南省博物館, 2014)를 본문은 주 참고 자료로 삼기로 한다.

현행본 《노자》는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의 전래본과 주소본(注疏本)을 가리킨다. 현존하는 현행본은 매우 다양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왕필(王弼)의 《노자도덕경주(老子道德經注)》는 가장 널리 읽히고 연구되는 판본이다.


《곽점》 <노자> 일부《백서(帛書)》와 《곽점(郭店)》 초간본이 발견되기 이전에는 하상공(河上公)의 《노자도덕경》, 엄준(嚴遵)의 《도덕진경지귀(道德眞經指歸)》, 왕필의 《노자도덕경주》, 부혁(傅奕)의 《도덕경고본편(道德經古本篇)》, 범응원(范應元)의 《노자도덕경고본집주(老子道德經古本集註)》 등이 비교적 오래된 계통의 판본을 전하고 있어 선본(善本)으로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이들 판본은 그 계통이 한대(漢代)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위진(魏晉) 이후에 성립한 전래본이므로, 한대의 모습을 직접 보존하고 있는 《백서》나 《곽점》과 같은 출토문헌과는 성격이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판본은 현행본 《노자》의 전승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본문에서는 현행본의 저본으로 왕필의 《노자도덕경주》를 누우열(樓宇烈)이 교석(校釋)한 《노자도덕경주교석(老子道德經注校釋)》(중화서국, 2016, 이하 《현행》)을 사용하고자 한다.

우리말 번역은 한간본(漢簡本)의 문자를 기본으로 삼되, 진고응(陳鼓應)의 《노자주역급평개(老子註譯及評介)》(중화서국, 1984)와 주겸지(朱謙之)의 《노자교석(老子校釋)》(중화서국, 1984)을 주요 참고문헌으로 활용하였다. 또한 필요한 경우 다른 연구 성과와 주석도 함께 참조하여 번역과 해석을 보완하였다. 다만 본 연재의 성격을 고려하여 참고한 자료의 출처를 본문마다 일일이 밝히지는 않으며, 추후 단행본으로 출간할 때는 관련 출전을 모두 제시할 예정이다.


앞으로 연재할 개요는 아래와 같다. 

본문은 지하 출토 문헌 《곽점》·《백서》·《한간》 및 《현행》 자료를 상호 비교하여 살펴볼 예정이다. 더불어 자형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하석 박원규 《백서》<임서>와 산민 이용 《금문노자》를 함께 살펴보겠다. 

본인은 젊은 시절부터 《노자》를 항상 가까이해 왔지만, 노년에 읽는 《노자》는 훨씬 더 감동적이다. 《노자》는 판본이 약 350종에 이르며, 우리나라에도 50종에 달하는 《노자》의 전문서가 발간되었고, 영어 번역본만 해도 250종을 헤아린다고 하니 그 인기를 실감할 만하다. 《노자》는 춘추전국 시기에도 그랬고, 한나라 때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인기가 좋다. 여전하다는 것은 지금도 지하에서 《노자》가 출토되고, 도굴되어 비록 그 출토 지역을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사용하는 문자와 자형의 필세와 형태를 대략적으로 예측할 수 있어 뜨거운 관심을 받는다는 뜻이다. 앞으로 그 감동을 다시 한번 독자와 함께 느껴보고 싶다.

지하 출토 《노자》는 《노자》의 출현과 현행본(‘전래본, 통행본’) 《노자》의 완성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지하 출토 문헌 《노자》’는 《한간》을 중심으로 20세기 이후에 출토되거나 세상에 공개된 《곽점》<甲><乙><丙>과 《백서》<甲><乙>, 《현행》을 함께 비교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한간》을 중심으로 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가장 최근에 세상에 공포된 자료이고, 지금 볼 수 있는 가장 완전한 내용을 갖춘 판본이기 때문이다. ‘가장 완전하다’는 것은 분량이다. 《곽점》의 내용은 현행본의 약 5분에 2에 해당하고, 《백서》는 파손된 부분이 너무 많아 알 수 없는 글자가 너무 많다. 하나 《한간》은 매 장마다 부호 ‘●’를 사용하여 구분하고, 몇 자를 제외하고는 ‘上經(德經) 2303자 + 下經(道經) 2942자 = 5242자’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현행》 노자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목전에 발견된 지하 출토 자료 중 가장 완전한 판본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한간》을 ‘선본(善本)’이라 한다. 


《노자》 <갑> 제1간

《곽점》은 중국 전국 중·말기 기원전 약 350년 내지는 기원전 300년에 죽간에 손으로 직접 쓴 지하 출토 문헌이다. 《곽점》은 《노자》<갑·을·병> 이외에 일부 내용은 다른 초죽서(楚竹書)와 한간백(漢簡帛), 또는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는 현행본 중에 보이기도 하는 이미 사라진 일서(逸書)를 포함하고 있다. 다른 초죽서에 있는 경우는, 《上海博物館藏戰國楚竹書》(이하 《상박초간》)의 《䊷衣》와 《性情論》을 포함하고 있고, 《帛書》의 《老子》 등이 있다. 이러한 자료를 상호 비교 연구한다면 그 가치가 한층 더 높아질 것이다.

《곽점》과 《백서》 <노자>는 각각 전국 중·말기 혹은 그 후의 기록물이 땅속에 약 2000년 이상 묻혀 있다가 그 형태 그대로 발견된 자료이기 때문에 어느 판본보다도 학술적인 가치가 크다. 이들 두 판본은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차이가 있다. 먼저 사용하는 문자들이 서로 다른 경우가 있다. 《곽점》은 《老子》<갑을병>을 합쳐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현행본의 5분의 2정도 분량으로 《백서》에 있는 내용들이 《곽점》에는 상당 부분 보이지 않는다. 또한 《백서》는 《곽점》에 비하여 추가된 문자나 조사를 쓰는 경우가 많다. 《곽점》 《노자》 중에는 <갑>과 <병>이 중복되는 내용이 있기도 하다. 《곽점》 《노자》는 현재 발견된 가장 이른 노자 판본이다. 하나 중복되는 내용이 있는 것 등으로 보아 《곽점》 중에도 각기 다른 판본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지금 우리가 보는 《곽점》 역시 가장 이른 판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서》 <갑>《백서》 <을>

《백서》는 일반적으로 <갑>과 <을>로 나눈다. 《백서》 중 <갑>은 한나라 고제 유방의 이름인 ‘邦’을 피휘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한 고조 이전 혹은 이때, 대략 BC 206~BC 196년에 수록된 것이고, <乙>은 ‘邦’자를 피휘하고 한 혜제(惠帝) 유영(劉盈)과 문제(文帝) 유항(劉恒)을 피휘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대략 한 문제시기 이전이나 이때, 대략 BC 179~BC 169 시기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백서》의 묘주 이창(利倉)이 수장된 해는 한 문제 12년으로 BC 168년이다. 문자는 세로로 그어진 붉은 색 줄(朱絲欄)에 검은 먹으로 쓰여 있다. 한 칸의 넓이는 대략 7mm이고, 한 자의 넓이는 대략 3에서 5mm이다. <갑>은 일반적으로 ‘소전본(小篆本)’이라 하고 <을>은 ‘예서본(隷書本)’이라 한다. 소전본 간백의 세로 길이는 약 24cm이고, 예서본은 세로 길이가 약 48cm이다. ‘소전본’은 문자가 상대적으로 많이 파손되었고, 예서본은 상대적으로 덜 파손되어 문자가 좀 더 많이 보인다. 《백서》는 ‘덕경’이 먼저이고, ‘도경’이 뒤에 있다. <을>의 마지막 부분에는 “德三千一”(덕, 3041)·“道二千四百卄六”(도, 2426)이라 하였다. ‘’는 ‘四十’의 합체이고, ‘卄’는 ‘二十’의 합체이다. 총 글자의 수가 ‘3041+2426=5467’자이다. <갑>과 <을>의 많은 자의 형태가 사실상 같다. 다만 <갑>은 종세(縱勢)와 횡세(橫勢)의 필세가 균일한 편이지만, <을>은 종세가 좀 더 강하다. 이에, ‘소전’과 ‘예서’본의 차이는 서체로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다. 따라서 ‘소전본’ 혹은 ‘예서본’보다 <갑><을>이라 칭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한간》은 한 고제 유방을 피휘하여 ‘國’자로 쓰고, ‘盈’자나 ‘恒’자가 자주 보이고, ‘啓’자는 세 차례, ‘徹’자는 한 차례 보인다. 한 혜제(惠帝)을 피휘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한간》은 대략 한나라 무제(武帝)시기에서 현제(宣帝)시기에 초록된 것으로 추론하기도 한다. 필체는 세련된 한예(漢隷)로 쓰여 있어 서한 중기, 대략 무제 후반기 때쯤이 아닌가 한다.

이를 개략적으로 정리하자면, 출토 문헌의 시기는 《백서》<갑>은 고조 유방(高祖 劉邦, BC202~BC195), 《백서》<을>은 문제 유항(文帝 劉恒, BC180~BC157), 《한간》은 대략 무제 유철(武帝 劉徹, BC141~BC87)나 선제 유순(宣帝 劉詢, BC74~BC49) 때의 문헌으로 추론되며, 《백서》<갑>에서 《한간》까지는 약 150년의 차이가 있다.


《한간》 <노자>

공자의 생애는 일반적으로 BC551에서 BC479년으로 추론한다. 《사기》에 의하면 공자가 노자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니 노자의 출생은 공자보다 좀 더 이른 시기일 것이다. 노자는 일반적으로 BC571에서 BC471년으로 추측하기도 하니 상당히 장수한 셈이다. 그래서 ‘노자’라 했는지도 모르겠다. 노자와 공자가 활동한 시기는 춘추 말기에서 전국 초기로 주나라가 몰락하고 제후들의 세력이 득세한 시기이다. 춘추전국시대는 제후들의 패권 경쟁과 끊임없는 전쟁으로 인간의 생명과 존엄이 쉽게 희생되던 시대였다. 제후들의 영토 확장과 권력 다툼 속에서 백성의 삶은 통치자의 정치권력에 전적으로 좌우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현실 속에서 《노자》는 이상적인 통치 원리를 제시하는 제왕학의 성격을 지닌다. 《노자》에서 말하는 ‘무위(無爲)’는 통치자가 따라야 할 정치 원리이자 통치술이며, 백성에게 베풀어야 할 최상의 왕도(王道)는 ‘덕(德)’의 정치이다. 이와 같은 《노자》의 정치철학은 당시의 현실에 대한 비판이자 이상적인 통치 질서에 대한 제안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이후 한나라를 거쳐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계승되었으며, 도교의 성립과 발전에 중요한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전국 시기 말기에 공맹의 유학과 묵가, 도가가 사상의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에 전국 중·말기 노자의 사상은 상당히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맹자는 일반적으로 약 BC372에서 BC289년으로, 장자는 일반적으로 약 BC369에서 BC286년을 생몰 연대로 본다. 당시에 유학과 도가 두 사상은 양대 산맥이었다. 장자는 노자의 신봉자였기에 《노자》는 전국 말기에 이미 상당히 유행하였다. 그럼에도 현재 볼 수 있는 《노자》의 가장 이른 판본이 《곽점》이다. 《곽점》에는 같은 내용이 〈갑〉과 〈병〉에서 문자를 달리 쓰는 것으로 보아 당시 《노자》 판본은 한 가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곽점》 <노자>는 현행본의 약 5분에 2의 분량에 불과하지만, 《백서》 <갑>과 <을>은 현행본과 그 분량에서 거의 일치한다. 이에 따라 《노자》는 한나라 초기에 완전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간》 <노자>와 《백서》 <노자>는 일부 장의 순서와 문자가 다르다. 이것은 당시 전해 내려오는 《노자》의 판본이 하나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고, 또는 《노자》 체제의 연변 현상일 가능성도 있다. 


《곽점》·《백서》와 《한간》의 서체는 예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서’는 진(秦)나라 시기에 완성되었다. 하지만 서체란 일시에 변환되는 것이 아니다. 먼저 조짐이 있고, 초기 단계가 있고 완성이 있다. 《곽점》의 서체는 예서의 조짐 단계이다. 전국 초간은 붓을 사용하여 대량의 문자를 기록하였기 때문에, 붓놀림과 빠른 속도로 대량의 문자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필획이 변화하였거나, 자부의 생략 등이 발생하고, 필세는 전서에서 연변된 형체의 예서로의 조짐들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를 ‘예변’이라 한다. 《곽점》과 《백서》, 《한간》은 목전에 직접 눈으로 서체를 확인할 수 있는 약 150년 이상의 차이를 둔 역사물이다. 각기 다른 시기에 각기 다른 문자 전문가가 당시 유행한 서체로 각각 취향에 따라 문자를 기록함에 따라, 그 속에서 문자의 변환, 서체의 발전을 찾아낼 수 있다. 《백서》는 붉은 색으로 세로 칸을 그어 그 안에 문자를 기록하였다. 특히 《백서》 <을>은 지금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서예라고 하는 예술적 미를 인식하고 서사하였음을 느낄 수 있다. 물론 당시에 서예라는 장르가 있지는 않았겠지만, 수많은 세월의 수련 단계를 거쳐 어떻게 문자를 기록하면 아름다운가라는 인식이 이미 있었다. 갑골문 역시 예술적 미를 인식하고 기록한 내용이 상당히 많다. 금문 중에 예를 들면, 전국 중산국 《중산왕석정》의 세로의 긴 필획의 필세는 예술적 미를 가미하기 위한 의도적 서사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대의 실질 필사물은 서체의 발전 변환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지하 출토 문헌 《노자》의 자료를 통하여 예서의 발전단계를 발견할 수 있다. 본문이 이해하는 그 발전 연변 과정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곽점》 : 예변(전서체). 전서체이나 예변의 조짐 단계

《백서》<갑> : 예전체. 전서에서 예서로 바뀌는 초기 단계

        <을> : 고예체(秦隷). 예서의 형체와 결구를 이미 구비한 중간 단계

《한간》 : 금예체(漢隷). 성숙한 예서체로 완숙 단계 


그동안 현행본 《노자》의 내용이나 분장의 구분 등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하였지만 《곽점》, 《백서》나 《한간》을 통해 그동안 문제가 되었던 내용을 적지 않게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현행본에 비하여 지하 출토 문헌은 ‘허사’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허사의 사용은 문장의 어감이나 끊어 읽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백서》는 또한 문장부호 ‘L’을 사용하고 있어, 구절 끊어 읽기를 알 수 있어 문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한간》은 매 장을 시작하는 첫머리에 문장 부호 ‘●’를 사용하고 있어 분장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이들 지하 출토 문헌의 발견은 《노자》의 탄생과 연변, 분장과 내용을 이해하는데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간》 제1~2간

본문에는 완성도를 높이기 위하여 <임모>본을 수록하고자 한다. 지하 자료 출토 문헌에 관심이 많지만 《백서》는 많은 자가 파손되어 안타깝게도 알아볼 수 없는 자가 많다. 이에 《백서》를 임모한 서예 작품에도 관심이 많을 것이다. ‘何石 朴元圭’의 《馬王堆帛書老子臨本》(미술문화원, 1985)(이하 ‘하석《임서》’)는 《백서》<노자>를 모사한 임모본으로 매우 빼어난 ‘임모’본이다. 《백서》는 문자 파손이 심해 뚜렷이 보이지 않는 자가 많다. 때문에 ‘하석 박원규’의 《임모》본을 참고한다면 문자 자형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을 것이다. 《백서》에서는 석문을 하고 있지만 약간의 자적만 보여 알아보기 힘든 자가 많다. 《임서》는 이러한 문자를 완전한 자형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문자 인식에 도움이 크다. 하나, 이는 또한 문제점이 되기도 한다. 일부의 자적을 완전한 형태로 인식하면 작자의 자의적 의식이 포함되기 쉽다. 본문에서는 이러한 문제점이 있는 경우에는 설명을 추가하기로 한다.


《한간》 <노자> 전편

이외에도 《노자》를 고문자로 작품화한 산민 이용(山民 李鏞) 《금문노자(金文老子)》(이화문화출판사, 2026)(이하 ‘산민《금문노자》’)가 주목할 만하다. 《금문노자》는 《노자》 전편을 금문으로 작품화했다. 서예 작품으로서의 가치는 물론, 고문자 금문 즉 전문(篆文)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에 해당 작품을 수록하고 필요한 경우엔 문자에 대한 설명을 추가하기로 한다. 《금문노자》는 서체 대상이 금문이다. 주지하시다시피, 금문은 청동기 위에 새겨진 문자를 가리키는 것이지만, 오랜 세월 동안 변화 발전된 문자이기 때문에 그 역사 또한 길다. 중국 상나라 시기부터 진한까지 지속적으로 연변되었다. 

문자는 인간의 사유를 전달하는 매개체이지만, 모든 의미를 완전하고 세밀하게 표현하는 데에는 본질적인 한계를 지닌다.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이미 존재하는 문자를 빌려 사용하는 가차(假借)가 활용되었으며, 특정 문자가 본래의 의미를 넘어 더 넓거나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도 나타났다. 통가자(通假字)는 이러한 문자 운용 방식의 대표적인 예이다.

중국 문자는 상형성을 바탕으로 형성되었지만, 실제 운용에서는 음성적 기능 또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고문자 연구에서는 문자의 형(形)·음(音)·의(義) 가운데 특히 음이 문자 해독의 핵심 단서가 되며, 음을 담당하는 자부(字符)의 분석이 고문자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

또한 중국 고대 사회는 교통과 정치·경제적 여건의 제약으로 지역 간 문화 교류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춘추전국시기에는 각 제후국이 서로 다른 문자 체계와 자형을 사용하거나 기존 문자를 독자적으로 변형하여 사용하였다. 그 결과 자형은 서로 다르더라도 음이 유사한 문자들이 상호 통용되는 경우가 빈번하게 나타났으며, 이러한 현상이 바로 통가자가 광범위하게 사용된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산민 《금문노자》는 금문의 종합서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소전까지를 ‘고문(古文)’이라 하고, 예서부터를 ‘금문(今文)’이라 한다. ‘고문’은 상형성이 상대적으로 ‘금문(今文)’보다 농후하다. ‘소전의 고문(古文)’은 《설문》에서의 ‘고문(古文)’과는 다른 성격을 갖는다. 《설문》에서의 고문은 소전과 다른 이체자로 주로 ‘동방문자’를 가리키는데 이는 동쪽 지역에서 주로 쓰인 문자로 ‘초계문자(楚系文字)’이다. 산민 《금문노자》는 ‘소전까지의 고문’을 금문의 풍격으로 썼다. 갑골문은 약 3천여 자를 인식할 수 있고, 은상주까지의 금문 또한 약 4천여 자가 있다. 이들 문자는 《현행》 <노자>의 글자를 모두 포함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현재 지하 출토 문헌은 이전보다 훨씬 풍부하게 발견되었다. 《노자》로 말하자면 《백서》가 있고, 《곽점》이 있다. 이외에도 현재 전국 시기 초나라 문자 ‘초간(楚簡)’이 계속해서 공포되고 있어 고문자를 ‘금문’ 풍격으로 표현하는 데 이전보다 훨씬 심적 부담이 적어졌다고 할 수 있다.

산민 《금문노자》는 금문의 종합서라 했다. ‘종합’이기 때문에 많은 이체자를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이체자는 작가에게 작품의 다양성을 제공하는 데 필수적이다. 하지만 독자에게는 문자를 더 많이 인식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이에 본문은 ‘산민 《금문노자》’를 수록하여 고문자 자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설명하고자 한다. 고문자에 대한 관심이 있는 서예가에게는 도움이 될 것이다. 혹은 본문이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는 전적으로 필자 본인의 책임이지 서예가와는 별개임을 독자는 헤아려 주기 바란다. 


본문이 다루어야 할 내용이 방대하여 독자에게는 다소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다. 따라서 가능한 한 핵심을 중심으로 간결하고 명료하게 서술하고자 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노자》는 현재까지 약 350여 종의 판본이 전해지며, 우리나라에서도 50여 종이 넘는 전문 연구서가 출간되었다. 영어 번역본 또한 250여 종에 이를 만큼 《노자》는 오랫동안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되어 왔다. 그만큼 《노자》의 이해 역시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다. 《노자》를 제왕의 정치술로 볼 것인가, 개인의 처세술로 볼 것인가, 혹은 ‘도(道)’, ‘덕(德)’, ‘자연무위(自然無爲)’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학자마다 견해가 다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다양한 해석을 가능한 한 균형 있게 소개하되, 필요한 경우에는 필자의 견해를 함께 제시하고자 한다.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해석일 뿐이며, 절대적인 결론을 제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 글에서는 나무를 보기보다 숲을 보는 마음으로 다가갈 예정이다. 나무는 각 개인의 사상이다. ‘각자의 사상’은 개인의 몫이다. 앞으로 독자의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TAG
0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