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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경주박물관, (재)백제세계유산센터 특별전 ‘세계유산 백제’ 개최
  • 김연수 기자
  • 등록 2017-03-17 10:08:30
  • 수정 2017-03-17 11:3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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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제 문화를 경주에서 한눈에

국립경주박물관(관장 유병하)과 백제세계유산센터(이사장 남궁영)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세계유산등재를 기념해 3월 7일부터 5월 7일까지 9주에 걸쳐 특별전‘세계유산 백제’를 개최한다.


▲ 무령왕릉 출토 묘지석


공주로 천도한 475년에서 멸망하는 660년과 부흥운동이 일어나는 663년까지 금강을 요람으로 하여 공주와 부여에 도읍하였던 약 2백년간의 역사를 왕도인 공주와 부여, 또 별도였던 익산으로 나누어 전시한다.


앞서 열린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가 도성·사찰·능묘로 나눈 생활사 중심의 전시였다면, 국립경주박물관의 전시는 공주·부여·익산 지구를 다시 8개 지구로 나누어 도시의 특성과 경관에 초점을 맞추어 전시한다. 또 신라 왕경에서 열리는 첫 백제 전시인 만큼, 신라 문물과의 비교적 시점에서 조망할 예정이다. 특히 부여 출토 대형 치미와 광배 등 팔백여점의 유물을 전시함으로써 백제문화의 위용과 함께 백제칠기·백제정원 등을 조명한다.



곰나루 웅진

‘제1장 475-538 웅 진시대의 도읍, 곰나루 웅진熊津’에서는 고구려에 밀려 급작스럽게 공주로 천도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30여 년간 존속한 왕도를 조명한다. 이 시기 백제는 신라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웅진시대 왕들의 무덤인 공주송산리고분군에 대해 무령왕릉 출토품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왕의 관식冠飾, 무령왕지석誌石과 글자새긴 은팔찌와 전돌을 통해 화려했던 웅진 백제의 모습을 그려본다. 남조 도자와 금송으로 만든 관재棺材를 통해 중국 남조南朝 및 왜倭와의 활발했던 교류 양상을 설명한다.


백제 무령왕릉 출토 금제모자형장식과 신라 금관총 출토 귀걸이에는 공히 고도의 누금鏤金기법이 보인다. 근년 발굴을 통해 왕성일 가능성이 농후해진 공산성에 대해 주칠朱漆문자가 쓰여진 옻칠갑옷을 비롯하여 목기류와 기와를 전시한다. 특히 옻칠갑옷의 연대 645년에 주목하여 웅진시대가 종료되고 왕도가 사비로 옮겨간 뒤에도 웅진성이 중요기능을 하고 있었으며, 당唐이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을 단행하는 등 상황에서 백제 역시 긴박하게 당에 대한 대비와 교류를 병행하였음을 설명할 예정이다.



▲ 무령왕릉 출토 은팔찌


소부리 사비

‘제2장 538-660 사비시대의 도읍, 소부리 사비泗沘’에서는 계획도시 사비의 면모를 전시한다. 정동리 전돌과 관북리 대통大通글자 인장와를 통해 538년 천도하기 이전부터 부여에서 도시건설이 이뤄지고 있었음을 이야기하고, 부部관련 글자가 있는 기와와 목간, 석문石文으로 왕경의 행정구역 5부를 설명한다.


이는 신라 왕경이 탁부喙部를 비롯 토착적 지연집단의 6부 구성이었던 것과 확연히 비교된다. 관북리 건물지 출토 기와류를 통해 왕궁터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으며, 부소산성 출토 금동광배와 무기류는 왕궁의 배후 방어성으로서 위용을 이야기해준다. 정림사 출토 소조불과 대당평제비탁본으로 정림사가 사비왕경의 중심광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쌍북리 출토 구구단 목간을 매개로 백제 사람들도 구구단을 실생활 곳곳에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능산리사지 출토 금동대향로(복제) 등과 능산리고분군 출토 관못과 관장식을 통해 이 시기 왕실 장례문화와 금속가공 기술을 엿볼 수 있다. 황룡사지 출토 6세기 전반 이른 시기 신라 수막새의 연꽃무늬는 사비 왕경 출토 백제 수막 새와 흡사하다.



▲ 무령왕릉 출토 금제관식


지모밀지 금마저

‘제3장 또 다른 도읍, 지모밀지枳募蜜地 금마저 金馬渚’에서는 익산 미륵사지와 왕궁리유적, 쌍릉 출토품을 전시한다. 미륵사지 서석탑 출토 사리병과 탑 건립의 내력을 기록한 사리봉 영기舍利奉迎記, 왕실과 귀족의 각종 공헌물은 화려했던 7세기 후반 백제 문화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줄곧 왕도를 옮기지 않았던 신라와 달리, 백제는 여러 차례 왕도를 옮기면서도 각지에서 색다른 문화를 꽃피웠다.



신라문화에의 영향

643년 신라 황룡사 건설을 위해 백제 공인 아비阿比가 건너갔다. 이와 같은 사실은 872년 중수하면서 새겨넣은 사찰주본기의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황룡사 출토 7세기대의 기와 등을 통해 그와 같은 백제와 신라 문화 교류의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다. 7세기 전반 백제 무왕은 서동薯童으로 불리던 젊은 시절 신라 선화공주와의 로맨스가 삼국유사에 전한다.


7세기 중엽 신라의 삼국통일 직후의 것으로 보여지는 경북 칠곡 송림사 전탑 출토 장식품은 백제 귀족의 은화관식을 모티브로 하여 신라적 요소를 가미했다. 7세기말 작성된 신라촌락문서는 7세기 초반 나주 복암리 백제목간에 보이는 호적 기재 방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황룡사지 출토 옥, 금동허리띠장식, 경주 감은사 출토 사리기중 유리병, 황남대총 출토 금귀걸이 등 신라문물은, 공주 무령왕릉 출토 왕관식과 옥장식, 익산 미륵사지와 왕궁리 출토 유리병과 구슬 등 백제 문화와 비교해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백제와 신라 양국은 정치적 대립 속에서도 꾸준히 문화와 인적 교류를 이어나갔다. 백제가 멸망한 후에도 그 문화는 신라 문화 속에 살아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 부소산성 출토 금동광배


백제 문화를 특화하여 설명, 영상자료를 활용

백제는 양梁의 선진건축술을 수용하고 와박사瓦博士제도를 두어 기술자를 우대했다. 부여 쌍북리와 공산성에서 보는 백제칠기문화, 왕궁리유적의 정원석을 토대로 백제정원문화를 특화하여 조명한다. 드론촬영한 공주, 부여, 익산의 8개 유적을 조망하는 대형 영상을 비롯, ‘백제금동대향로’, ‘서동요’ 등 총 5개의 영상을 곁들여 전시의 이해를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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