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기 시대 (舊石器 時代, 260만년~300만년 전 – 약9,000년 전~15,000년 전경) 중기 뼈나 돌에 새긴 조각들이나 기원전 10,000년 전쯤 선사(先史) 인류 문명인이 사용하던 그림 문자에서 곧 문자의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초기 의사소통의 대상으로 그림 문자가 사용된 것은 인류의 문명의 발상지인 중국,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n), 이집트, 마야 등의 문자를 들 수 있는데, 그 가운데 중국의 한자(漢字)는 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자 중의 하나로, 많은 변천을 거쳐 지금까지 사용되는 유일한 고대(古代) 문자이다. 이러한 한자는 마치 그림과도 비슷하여 유구한 중국 민족의 문화와 지혜를 깊이 담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한자는 언제쯤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을까?
사실 한자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전설이 전해오고 있으나 그걸 정확히 고증할 수는 없고, 다만 그 기원을 추측할 수 있는 자료로 고대의 암각화(巖刻畵)나 도기(陶器), 부호(符號)*, 그리고 많은 문헌 속에 나타나는 기원에 관한 학설(學說)들이 있어 참고할 수 있을 뿐이다.
다음에 간략히 그 몇 가지 대표적인 한자 기원의 학설을 살펴본다.
大汶口 陶尊 부호
半破의 토기 부호
토기 문자
1. 팔괘설(八卦說)
중국 민족의 시조라 전해지는 상고시대(上古時代) 복희씨(伏羲氏)**가 팔괘를 만들어 백성을 다스렸다는 설(說)이다. 예를 들면 감(坎)괘는 세로로 세우면 ‘水’자가 되고, 리(离)괘는 세로로 세우면 ‘火’자가 되고, 곤(坤)괘는 세로로 세우면 川자가 된다는 것이다.
동한(東漢)시대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 「서(敍)」에서 이르기를
“古者庖犧氏之王天下也 仰則觀象於天 府則觀法於地 視禽獸之文 與地之宜 近取諸身 遠取諸物 於是始作<易>八卦 以垂憲象”
즉 “옛날 포희(庖犧: 복희)씨가 천하를 다스릴 때 하늘의 형상을 살피고 땅의 이치를 굽어보아 새와 짐승의 무늬와 사물을 살펴 가까이에서는 몸에서 취하고 멀리서는 사물에서 취하여 처음으로 ‘역(易)’의 팔괘를 그려서 만물의 표준으로 삼았다.”라 하였다.
이처럼 복희씨(伏羲氏)가 팔괘를 만들어 세상을 통치하는 수단으로 삼았다는 설이 있으나 팔괘가 곧 문자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단 결승(結繩)과 함께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며, 문자가 탄생하기 이전의 자연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부호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위와 같은 내용은 『주역(周易)』 「계사(系辭)」에도 실려있다.
易 八卦
2. 창힐설(蒼頡說)
허신(許愼)의 『설문해자』 「서」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蒼頡之初作書也 蓋依類象形 故謂之文 其後形聲相益 卽謂之字”
창힐이 처음 글자를 만들 때 대체로 부류의 모습과 형태를 따랐으므로 ‘文’이라 했으며, 그 뒤에 형태와 소리가 서로 더해져 이를 ‘字’라고 하였다.
창힐(BC4666~BC4596)은 고대 전설 시대인 황제(黃帝) 시대의 사관(史官)이라고 기록은 전한다. 이러한 창힐이 한자를 만들었다는 최초의 문헌 『순자(荀子)』 「해폐편(解蔽篇)」에 이렇게 적고 있다
“好事者衆矣 而蒼詰獨傳者一也”
즉 “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았으나 창힐 혼자만이 전하고 있다.”라 하였으니 창힐이 한자를 전(傳)한 유일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이 밖에도 창힐 조자설(造字說)을 기록하고 있는 문헌은 『여씨춘추(呂氏春秋)』 「군수편(君守篇)」, 『한비자(韓非子)』 「오두편(五蠹篇)」 「창힐편(蒼頡篇)」, 『설문해자(說文解字)』, 『회남자(淮南子)』 등이 있다.
다만 이에 대하여 현대에 이르러 많은 학자들은 창힐이 직접 한자를 만들었다 하는 데 동의하는 학자는 거의 없으며, 창힐이 당시에 문자를 다루는 관직에 있으면서 한자의 발전에 많은 공로를 한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結繩文字
잉카의 매듭문자 表數法
3. 결승(結繩)과 서계설(書契說)
결승은 새끼(노끈)나 초목의 덩굴 등을 사용하여 숫자나 역사적 사건 등을 매듭을 지어 걸어 놓아 그 매듭의 수효나 간격에 따라서 의사를 전달하는 방법이며, 서계(書契)는 결승에서 다소 진보된 의사 전달 방법으로 이에 대한 구체적인 개념이나 형태, 사용 방법 등을 기록으로 전하는 것이 없고, 다만 어떤 새길 수 있는 도구와 재료를 사용하여 눈금이나 기호(부호) 정도를 표시하는 방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 『설문해자』에 “書, 箸也(書는 기록하는 것이다)”라 하였고, “契, 大約也(契는 굳게 약속하는 것)”이라 하였다.
결승은 갑골문이 사용된 상나라 시대 이전인 지금으로부터 약 4,500년 전일 것으로 추정한다.
허신은 『설문해자』 「서」에서 “及神農氏 結繩爲治而統其事 庶業其繁 飾僞萌生 黃帝之史蒼頡 見鳥獸蹄迒之迹 知分理之可相別導也 初造書契 [신농씨(神農氏)***에 이르러서는 결승(노끈)을 묶어서 다스리고 여러 일을 통괄하였는데 일이 많아지고 번잡해지니 꾸미고 거짓된 것들이 생겨났다. 황제의 사관인 창힐이 조수(鳥獸)의 발굽과 발자국을 보고 나뉘는 이치가 서로 다름을 알고서 처음으로 서계(書契)를 만들었다.]”라 하여 팔괘와 결승이 모두 한자가 아니라 한자 이전 의사전달의 보조 수단으로 인식하였다. 즉, 신농씨 시대에 매우 구체적이고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음을 기록하였다.
이밖에 하도낙서(河圖洛書) 기원설, 갑자(甲子) 기원설, 조수조적(鳥獸足跡) 기원설 등이 있으나 모두 위 3개 학설의 범주에 든다 할 수 있다.
-----------
* 앙소(仰韶) 문화(기원전 5,000년~기원전 3,000년)의 토기에 새겨져 있는 여러 가지 부호는 갑골문자 시대보다 약 2,600년 이상 앞선 것으로 보고 있으며, 한자가 만들어질 수 있는 기초가 되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半破의 토기 부호, 大汶口 陶尊 부호 등이 있다.)
** 중국 고대 전설상의 제왕(神)으로, 삼황오제 중 중국 최고의 제왕이며, 달리 포희(包犧)라고도 불리운다. 陳에 도읍을 정하고 150년간 제왕의 자리에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몸은 뱀과 같고 머리는 사람의 형상으로 일월과 같은 대 성덕을 베풀었다 한다.
*** 신농씨의 성은 姜이고, 이름은 괴(魁)이다. 주역에 의하면 복희씨가 죽고 신농씨가 나타났는데 농사짓는 일을 잘하고 좋아했기 때문에 신농이라 불렸다 하며, 얼굴은 사람이지만 용의 눈을 가졌다 한다.